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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 갔던 노무현 대통령

이카로스의 날개 2009. 9. 7. 01:15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갔던 노무현 대통령

 

 

허 운 나 전 ICU 총장


지난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충격적인 TV뉴스를 접하고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60년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한 충격이 또 있었을까? 필자에게 `내가 만난 가장 순수한 정치인'이라는 별칭을 안겨줬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행복하고 즐거웠던 옛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 분과의 관계를 회고하는 것으로 추모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필자가 노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고 또 인간 노무현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6대 국회 여당인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노 전 대통령이 후보로 참여한 2002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과 시작된다. 필자는 교수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전문인 IT분야와 정치를 접목시키는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정치에 몸담은 4년이란 짧은 세월 중 가장 극적인 실험시도는 전자투표시스템을 직접 지휘, 성공적으로 개발해 낸 일과 또 이를 기반으로 세계 정당사상 최초로 전자투표시스템을 통한 대통령후보 경선을 치러낸 일이다.

노무현 후보를 포함한 7명의 후보가 참여, 제주도에서부터 시작된 이 경선은 전국 16개 시ㆍ도를 거치면서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 끝에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는데 이 시스템 운용을 진두지휘한 필자는 경선과정에서 보여준 노 후보의 진정성과 서민적 풍모에 점차 매료돼 갔다.

경선 이후 곧 실시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노 후보와 필자는 유세연설자로서 재회하게 됐다. 비 오는 어느 날 유세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는 필자에게 노 후보는 우산을 받쳐줬고 먼 거리에 있는 다음 유세장소로 이동하면서 한차에 동승하게 된 우리는 2~3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는 차안에서 권위적인 위계조직을 뛰어넘는 수평조직을 지향하고 권력과 부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균형발전의 비전을 처음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노 후보는 대통령과 스텝들이 함께 팔을 걷어 부치고 대화와 토론을 하는 민주적인 모습, 서울만이 아닌 전국이 골고루 발전하고 대기업만이 아닌 중소ㆍ벤처기업이 함께 상생하며, 소수의 부자만이 아닌 서민들이 최소한의 인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혁신적이고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는 노 후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뛰었다. 노 후보와 그가 지닌 철학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한국의 사회상을 혁신하여 21세기 글로벌 세계로 성큼 나가게 할 수 있는 비전의 지도자로 내게 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사고의 패러다임이 서로 통하는 것을 느끼고 바로 의기투합, 나는 달리는 차안에서 노 후보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이후 필자는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인터넷선거본부장직을 맡아 본격적으로 노 후보의 선거를 지원하게 됐는데 노 후보의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후보가 직접 참여해 영상으로 먼 곳의 지지자들과 실시간 대화를 나누는 등 다양한 이벤트를 전개했다.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상대당 후보보다 압도적이었지만 문제는 투표참여율이 저조한 젊은이들을 어떻게 하면 얼마나 많이 투표장소로 끌어내는가였다. 하지만 모든 게 기우에 불과했다.

궁색한 예산으로 운영되는 홈페이지에는 젊은 지지자들이 멋진 멀티미디어 자료를 만들어 올렸고 차츰 많은 이들이 원칙의 사나이, `바보 노무현'의 진정한 면모를 소개하면서 홈페이지는 인간 노무현을 둘러싼 감동의 사연들로 가득 찼다.

전국의 유세장을 함께 돌면서 노 대통령의 명석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이후 후보 단일화 과정과 정몽준 의원의 지지철회 등 일련의 정치적 사태들에 대해 가슴을 아파하면서도 원칙을 중시하는 노 후보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오히려 인터넷에서 젊은이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어 노 후보는 다시 한번 모든 이의 예상을 뒤집고 보기 좋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터넷이라는 동시성과 확대성의 매체를 만나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은 노 대통령 당선자를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나는 새로운 시대와 인터넷을 이해하는 후보를 만나 전문성과 정치의 결합이라는 실험을 대통령 선거라는 특수한 무대에서 운 좋게도 성공적으로 맛보는 역사적 경험 속에 있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 된 과정을 빗대어 스스로를 `벤처 대통령'이라 불렀다. 그는 벤처산업에 대한 이해도 빨랐다. 대통령 시절 미국 실리콘밸리 방문을 수행한 당시 벤처협회 장흥순 회장은 IT벤처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직접적 지원보다 벤처산업의 생태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대통령의 이해력이 상당히 빠르고 깊어 불공정거래의 제거, M&A과정에서 미실현 이익에 세금부과 시정 등과 같은 일들을 적극적으로 처리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벤처 코리아 행사에 참여해 직접 두 시간씩이나 열정적인 강의를 하면서 벤처 기업의 중요성과 벤처기업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강조할 정도였다.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은 물론 마케팅의 어려움도 알아 청와대에 직접 국산 벤처회사의 제품을 납품하도록 하면서 스스로 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의 균형발전의 철학이 여기에도 작용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 미래의 신성장동력을 IT서비스와 이를 뒷받침하는 네트워킹, 그리고 IT관련 제품개발에서 찾고자 `IT 839정책'을 국가 IT비전으로 내걸었다. 해외방문 시 정보통신부 장관을 배석시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세계에 `IT 강국 코리아'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 DMB폰과 와이브로 등은 세계적으로 우리가 처음 기술개발에 앞선 사례이다.

노 대통령은 특히 아프리카나 중동,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의 자원부국에 자원외교를 펼쳐 우리의 IT기술과 자원교류의 물꼬를 텄다. 정부시스템은 모두 디지털 시대에 맞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행정전산화의 세계적인 모델을 이끌었다. 노 대통령은 소프트웨어의 중요성도 인식, 소프트웨어산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분야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IT를 지극히 사랑했던 노 대통령의 국가비전과 함께 정통부가 없어진 지금은 IT분야 컨트롤 타워가 없이 비전을 잃고 방황하며 무엇인가 뚫려 있기보다는 막혀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는 우리 곁을 떠났다. 수많은 국민의 애도도 그를 우리 곁에 다시 오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때는 늦었지만 그의 진정한 모습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된다.

우리는 진정 어떤 지도자를 그리워하는가?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주위의 오해와 비난에도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갔던 노무현 전 대통령.

인간적인 괴로움 속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미안해요, 우리 함께 하지 못해서 - 당신의 꿈, 당신의 고독, 당신의 고뇌 - 모두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생전에 못다 하신 일 우리 국민들이 해내겠습니다.

 

※ 편집자注 : 허운나 전 의원 (전 ICU.한국정보통신대학교 총장)이 대통령님 서거 직후 쓰셨던 추모의 글입니다. 허운나 전 의원은 참여정부에서 가장 IT 마인드가 높으셨던 분입니다. 글을 찾아 올려주신 미래헌법재판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허운나 : 플로리다대학교대학원 / 교육공학 박사 / 1998.12 여성정보문화21 회장 / 2006년 제22회 프리야다쉬니 글로벌 어워드 교육부문 공로상 / 2002년 국감모니터단 선정 국감우수의원상 / 2002년 시민단체가 뽑은 2001년도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 2004.07~2007.11 한국정보통신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