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의 적, 노회찬의 적, 노무현의 적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03-08)
세무 전문 변호사로 잘 나가던 노무현을 가시밭길로 불러들인 것은 고문당한 대학생의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1981년 부림사건이라는 용공 조작 사건에 걸려들어 두 달 동안 고문당한 젊은이가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변호사조차 불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무현은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인권변호사로 나섰다.
세무 변호사 노무현도 처음에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판사와 검사에게 변호사가 굽신거리는 풍토에 맞서고 사건 브로커에게 커미션을 주지 않으면 수임이 안 되는 잘못된 관행을 따르지 않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수록 노무현은 실력으로 승부를 하려 했다. 노무현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보다는 가치였다. 어쩌다가 들어오는 조세 관련 사건을 밤을 새워가면서 작성한 치밀한 변론으로 번번이 승소로 이끌었고, 결국 세무 변호사로 입지를 굳히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와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세무 변호사 노무현을 껄끄럽게 여기는 경쟁자들은 있었을지 몰라도 시민 노무현을 적대시하는 존재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없었다. 노무현은 본업에만 충실하면서 보통 시민들처럼 독재 권력에 적당히 분개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민 노무현에게는 남이 겪는 아픔도 나의 아픔이었다. 노무현을 직접 괴롭히는 적은 없었지만 죄 없는 남들을 괴롭히는 공공의 적은 있었다. 시민 노무현은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단란한 가정을 버리고 가시밭길로 나섰다.
노무현이 부림사건을 변호하는 동안 정동영은 1982년 MBC 기자로 전두환의 아프리카 순방에 따라가서 전두환의 케냐 방문을 찬양했다. 광주 학살이 겨우 2년 전에 있었고 정치인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고 아직도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정동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전두환 대통령의 케냐 방문이 어수선한 케냐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정동영의 적은 전두환이 아니었다.
정동영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것은 김대중이었다. 정동영은 깔끔한 용모와 방송 인지도를 앞세워 전주에서 전국 최고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정동영에게도 적은 있었다. 정동영의 적은 자기의 입신양명과 권력 장악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였다. 정동영의 적은 철저히 정동영 개인의 적이었다. 정동영에게는 지켜야 할 가치가 없었다. 자기가 만든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당을 없애고 민주당과 합쳤고 민주당 지지율이 낮아 수도권 출마가 부담스러우니까 탈당하여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나와서 당선되어서는 다시 복당했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는 노무현에게 장인이 좌익이었다면서 색깔론을 제기했다.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정치인 김대중과 그의 지지자들을 빨갱이로 덧칠하면서 괴롭힌 조선일보식 색깔론이 김대중 덕분에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의 입에서 나왔다. 정동영은 국민의정부 말기에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의 총공세로 기진맥진한 김대중 대통령을 짓밟는 데도 앞장섰다.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사람을 옹호하는 것은 애당초 정동영의 생리에는 맞지 않았다. 정동영에게는 힘이 곧 정의였다. 그래서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기자로 출세하기 위해 전두환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김대중이 보수 언론에게 공격을 당할 때는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수 언론의 총공세에 지지율이 떨어지는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의 머리에는 의로움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정동영에게는 자신의 생존만이 중요했다.
식물 대통령 김대중을 끝까지 옹호한 정치인은 오직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당내에서도 너도나도 대통령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민주당 당원들 앞에서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진실인양 대문짝만 한 기사로서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수구 세력의 술수로 민심에 거대한 역류가 일어나고 있지만 20년 뒤 역사의 법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걸은 길은 올바른 길로 평가를 받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갖자면서 모두가 외면하던 김대중을 끝까지 옹호했다. 노무현의 적은 나를 짓밟는 세력이 아니라 남을 부당하게 짓밟는 세력이었다.
그런 세력의 중심에 있는 것이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창간되고 얼마 동안은 민족지였던 적도 있지만 광산으로 돈을 번 방씨 집안에게 경영난으로 넘어간 뒤로는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찬양한 신문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과오를 저지른다는 것과 과오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조선일보가 과거에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하더라도 지금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한다면 과거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자신의 과오를 생존 논리로 끝까지 정당화한다. 조선 왕조가 못 났기 때문에 일본한테 먹힌 판국에 나라고 민족이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철저한 생존지상주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라도 붙을 수 있다는 논리다. 생계에 허덕이는 개인의 생존론과 한 나라를 대표하겠다는 이른바 정론지의 생존론을 같은 잣대로 잴 수는 없다. 하루에 수백만 부를 찍어대는 조선일보의 생존지상주의는 결국 나만 잘 살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젖은 사람을 양산해낸다.
이런 조선일보가 며칠 전 창간 90주년을 맞았다.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이 조선일보 만찬장에 집결했다. 생존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조선일보에 생존지상주의 정치인 정동영이 눈도장을 찍으러 안 나타날 리 없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한국의 진보 가치를 독점하면서 노무현을 그악스럽게 물어뜯던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도 나타나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 옆에서 사이좋게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조선일보의 90돌을 축하했다. 정치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하루에 수백만부를 찍는 조선일보에 밉보여서는 안 된다. 경쟁 자본주의에 외로운 돛단배처럼 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서 경쟁과 복지의 조화를 위해 노력했던 참여정부를 계급 갈등을 은폐하면서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삼성에 종속된 정치 모리배라며 욕하더니 정작 본인은 한국을 승자 독식의 저질 자본주의로 끌어내리는 데 앞장서는 신문의 만수무강을 비는 자리에 나타나서 눈도장을 찍는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논리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는 조선일보는 노회찬의 적이 아니다. 노회찬의 적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다. 노명박은 실재한다. 노명박은 노무현과 이명박이 아니라 노회찬과 이명박이다. 노회찬과 이명박은 모두 생존지상주의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적은 노무현이다. 정동영의 적도 노무현이다. 노회찬의 적도 노무현이다. 노무현은 생존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므로 노무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들의 생존을 끝없이 위협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적은 조선일보도, 정동영도, 노회찬도 아니다. 노무현의 적은 자기 자신이었다. 겁에 질린 타인의 눈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고픈 마음이었다. 가치를 추구하는 고단한 길보다는 한국의 기득권을 장악한 생존지상주의에 영합하고픈 마음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정치인에게는 생존을 뛰어넘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엉이바위에서 몸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이 떠안은 모순의 핵심에는 생존지상주의의 화신 조선일보가 있다. 조선일보는 한국의 공적이다. 공당은 공적과 싸워야 한다. 공적에게 빌붙는 당은 사당이다. 민주당과 진보신당은 공당이 아니라 사당이다. 한국의 공당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뿐이다. 두 당만이 조선일보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공당만이 국민의 지지를 호소할 자격이 있다. 한국의 공당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뿐이다. 조선일보와 싸우기 때문이다. 생존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길이기도 하다.
(cL) 개곰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18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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