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삼봉 정도전"을 말한다.
그의 삶에서 나는 위로 받았고, 또한 인간의 삶.
남자의 야망과 포부를 알게 되었고.
600년전 그가 이루고자 한것이 지금의 나와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크게 놀�다.
그가 못다 이룬것을 내가 이루겠다.
아직도 반석을 다지는 단계이지만, 그것은 30대 후반까지이고
40대에서 정말로 승부를 걸겠다.
1872년 4월 2일 고종은 경복궁 중건에 즈음하여 공을 복훈하고 사당에 죽산부사 이헌경을 보내 치제하였다.
동치(同治) 12년(1872) 4월 2일 국왕은 신 죽산부사 이헌경을 보내어 고 봉화백(奉化伯) 문헌공(文憲公) 정도전(鄭道傳)의 영전(靈前)에 제사를 지내노라.
옛날 우리 성조께서 왕업을 열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함으로써 억만년 기반을 닦으실 제 하늘이 중임을 맡을 사람을 탄생시켰으니, 경은 실로 왕좌(王佐)의 재능을 지닌 인물이로다. 경은 세상을 구제하여 다스릴 수 있는 재량과 덕망으로 개국공신 중 으뜸이 되었는가하면, 예악(禮樂), 정교(政敎), 전장(典章), 법도(法度)의 기강을 확립시킴으로써 큰 규범을 모두 갖추게 하였도다. 그리고 끝까지 주선하지 않은 일이 없고 궁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었으므로, 거대한 계획을 세움에 있어 진실로 순수하고 충성스런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도다. 궁전의 터를 잡을 적에도 반석 같이 안전하게 하여 큰 복을 더욱 크게 한 것은 물론 800세(世)를 이어갈 기반을 점지하였도다. 그리하여 조정의 법도와 궁금(宮禁)의 훈의(訓義)르 전(殿)마다 문(門)마다 기록해 놓았는데, 잘 되기를 송축하는 뜻이지만 그 속에는 경계하는 뜻이 곁들여져 있었도다. 성조께서 보위에 오르셔서 두 손만 잡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하였으니, 이는 경의 공부가 경술에 근본을 두어 학문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를 관통하였고, 도(道)는 문질(文質)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도다.
주공(周公) 같은 마음, 공자(孔子) 같은 생각, 이윤(伊尹) 같은 충심, 부열(傅說) 같은 보좌심에 의거 경제문감(經濟文鑑)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으셨는데, 이는 자신의 심성(心性)을 그대로 모사(摹寫)하여 드러낸 것이었네. 또 이단을 배척함에 더욱 엄격하여 맹자(孟子)가 양묵(楊墨)을 물리치듯 하였고, 불교를 배척할 적에는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린 것처럼 하였으므로, 우리 도(道)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밝게 빛날 수 있었도다. 여러 번 분부를 내려 정중하게 은유(恩諭)하였고,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네 글자를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내렸는가 하면, 인각(麟閣)과 운대(雲臺)에 대려(臺礪)의 맹세가 찬란하였으니, 이렇게 빛나고도 위대한 공렬에 대하여는 의당 백세(百世)를 두고 보답해야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지난날 정조대왕께서 유편(遺篇)을 간행하여 석실에 보관시킴으로써 영구히 전해갈 수 있게 하라고 명하셨도다.
짐이 끝없이 이어갈 국가를 이어 받았으니 본받아야할 것은 본 받고 성조의 뜻을 계승해야할 것은 계승하고 싶었으므로 훈전(訓殿) 사문(四門) 명당(明堂) 구실(九室)을 중건(重建)하니, 오래된 나라이지만 천명(天命)을 받은 곳은 오직 새롭기만 하다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되어 계승해 가리라고 다짐하노라. 이 때를 당하여 국초(國初)를 회고(懷古)해보니 내 마음의 감동이 끝이 없어 사람을 시켜 맑은 술을 권하노니, 영혼은 내려와 흠향하시기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