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이야기

자아를 잃은 현대인의 비극

이카로스의 날개 2009. 1. 21. 01:10

 

자아를 잃은 현대인의 비극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5년 3월 20일,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지령을 받은 일단의 옴진리교 신도들이 도쿄 지하철에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를 투척했다. 이 사건은 3800여명의 공식적인 피해자와 11명의 사망자를 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건이 발생한 지 약 1년 후 부터, 사망자 유족을 포함한 사건의 피해자 60여명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게 '언더그라운드(열림원,1998)'다.

대담을 마친 하루키는 이 책의 말미에 옴진리교 사건에 대한 나름의 보고서를 쓰는데, 여기서 그는 두 가지를 말한다.

먼저, 개인의 자율성은 본래 사회라는 타율성과 교섭하면서 형성된다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회와의 교섭이나 사회의 반영없이 자율적인 자아를 만들어 버린다. 그럴 때, 사회적 논리와 개인 사이에 갖은 알력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그런 인물이다.  

앞서의 사항은, 흔히 우리가 '쟤는 사회화가 덜 됐어'라고 지적하곤 하는 것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난 것은 하루키가 강조하는 두 번째 사항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이용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란 나는 어떠어떠하게 살고 싶어'라거나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두 개의 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실적인 나'와 '꿈을 꾸는 나', 이걸 풀어보면 이렇다. '비록 지금은 호텔의 화장실 청소부지만(현실적인 나), 언젠가는 이 호텔의 사장과 결혼하고야 말겠어(꿈을 꾸는 나)'. 바로 이게 이야기다. 누구는 좀 더 명료히 의식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할 뿐, 누구나 나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에 세뇌 당하고 현실에 포박된 현대인들 가운데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엔진(자아)없이 차(이야기)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고유한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자아를 양도하게 되며, 자신의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자동 기술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옴진리교의 신도들은 고유한 자아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흠집 많은 자아의 소유자인 아사하라 쇼코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위탁해버렸다. 하자 많은 거푸집 속에 구겨 넣어진 양도된 자아(신도)들이 만들어낸 비극이, 바로 '언더그라운드'다.

 

소설가 장정일

 

 

데일리노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