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책

공재 윤두서 :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이카로스의 날개 2012. 3. 30. 23:15

 

 

 

 

 

기대가 너무 컸나?.. 대표작인 [자화상] 빼고는 그리 신묘하지 않은 작품들.

그뿐 아니라 삶 자체와 다른 영역 부분에서도 그리 눈에 띄는 부분이 없다.

 

 

공재 윤두서  :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시리즈 : 조선의 화가들2

저 : 박은순 ㅣ 출판사 : 돌베개 ㅣ 발행일 : 2010년 01월20일ㅣ376쪽 ㅣ 175x225 

인상깊은문구

 

- 그는 영원히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은미하게 보신하면서 언젠가 오게 될,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렸다.

자신의 꿈이 당대에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 여러가지 사건들은 모든 것을 안으로 삭이고자 했던 윤두서에게도 큰 상심과 충격이었다.

 

- '도룡'이란 [장자]에서 유래된 고사로 높은 수준의 기교 또는 수준은 높지만 사용할 데가 없는 기교, 혹은 영웅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 그대를 잃은 것은

  우리 도의 끝이로다.

 

  두번째 나를 잃었네

 

- 길고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은 장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 중 하나로 왕성한 생기를 발산하는 듯이 보인다.

 

 

생생하게 되살린 공재 윤두서의 삶과 예술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이 작품에 표현된 그의 모습은 종이를 뚫고 세상을 넘어설 듯한 눈빛에 강렬한 기세와 의지를 담고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장수와 같이 당당하고 결연해 보이는 풍모 이면에는 고독과 우수가 드리운 듯하여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작가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을지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이 책은, 공재 윤두서의 생애와 작품, 그의 내면세계를 면밀히 추적하여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로서의 면모를 밝히고, 선비화가로서 당대에 누렸던 명성을 오늘날 오롯이 되살리고 있다.

공재 윤두서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조선 후기의 문화가 막 정립되던 시기에 살았던 명문 가문 출신의 선비화가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풍속화와 산수화에서도 회화의 새로운 방향과 방법론을 제시하여 일찍이 조선 후기 화단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 책에서는 윤두서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삶의 내력에 따라 형성된 그의 작품들을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윤두서가 직접 필사하여 남긴 [기졸]記拙 및 여러 유고와 고화첩, 그리고 윤두서와 관련된 사건과 일화를 수록한 문서 및 사료 등을 정리하고 분석하여 그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윤두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한눈에 파악하는 한편, 생애의 중요한 사건 및 상황과 연결하여 윤두서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윤두서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 막연하게 주제별?양식별로 정리되었던 작품들을 화가의 생애와 연결하여 구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에 좀더 깊이 접근하여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척한 새로운 예술세계
윤두서는 기호 남인을 대표하는 집안 중 하나인 해남 윤씨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인물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 과거를 통해 출세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쟁으로 인해 출세의 소망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잠심하는 삶을 살았다. 명문 가문의 출신으로 많은 특권과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에 주목받던 집안의 종손이라는 운명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하여금 늘 신중히 보신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도록 했다. 남인과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심화되면서 윤두서 주변의 수많은 인사들이 유배를 가거나 목숨을 잃었고, 윤두서는 집안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둔세遁世의 삶을 택했던 것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뛰어난 화법과 개성 있는 표현, 정교한 기량으로 완성한 작품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서려 있는 깊은 우수와 쓸쓸한 기운은 그의 출신 배경과 현실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윤두서는 양반 사대부로서 평생 농민과 서민을 경영하며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실천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은 [나물 캐는 여인],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등의 작품과 같이 조선 후기에 최초로 풍속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자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산수화 분야에서도 새로운 방법론과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되는데, 그는 이념과 명분을 강조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채 공리공론을 일삼던 기존의 성리학풍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선비 그림의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근기 남인 사상과 학풍의 계승
윤두서가 활동하던 숙종 대에는 노론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기로 그는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당쟁이 치열한 때를 살았다. 해남 윤씨 집안은 남인 중에서도 서인과의 타협을 가장 거부한 청남淸南의 계보에 속했고, 정국의 흐름과 변화는 집안사람들의 처세와 대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배경은 윤두서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윤두서는 스스로를 보신하면서 가학과 가풍을 후대에 전수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이서, 이잠李潛, 심득경沈得經 등 근기 남인학파의 선비들과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했다. 이들의 모임에서 근기 남인의 학풍과 사상, 예술이 전수되고 심화되었고, 후일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에 의해 근기 남인학파가 발전하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특히 윤두서는 이익 형제들과 매우 밀접하게 학문적 교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중국과 서양 서적을 비롯한 수천 권의 도서를 열람하고 토론했던 과정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윤두서의 작품세계는 실학적 성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창조,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면모 또한 윤두서의 예술을 설명하는 배경이 된다.

윤두서의 회화가 이룬 선구적 성취
윤두서는 당대로부터 19세기까지 선비화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으로 학식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취적인 의식과 사상을 삶 가운데 실천하여 존경받은 선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서화 예술에 관한 높은 식견과 뛰어난 재능, 회화 예술을 격상시킨 선구적인 방법론 등은 윤두서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주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선비화가로서 겸재 정선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당대에는 정선보다 윤두서에 대한 평가가 훨씬 높았고 사후에도 남인계 선비들 사이에서 꾸준히 추앙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진경산수화는 정선’, ‘풍속화는 김홍도’, ‘문인화는 김정희’라고 알려져 있듯이, 윤두서가 이룬 선구적인 성취와 업적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윤두서가 시도한 새롭고 다양한 주제, 화보와 판화 등의 매체 활용, 남종화의 방향성 모색, 회화의 수장과 감평, 화론, 전각 등 다방면에서의 활약을 총체적으로 다루어 윤두서의 위상과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1장 유복한 남인 집안의 종손
들어가는 말
윤두서의 [자화상]
유복한 가문의 축복받은 종손
-해남 윤씨 종가
해남 윤씨 가풍의 형성과 전수
한양에서 보낸 꿈 많은 청년기
윤두서의 교유와 인척
당쟁의 심화와 생부 윤이후의 은둔
윤두서의 문집 [기졸]記拙과 그의 내면세계
여행과 풍류
-윤두서와 진경산수화
-서화의 수장과 품평

제2장 학문과 사상을 통한 개혁의 모색
수신제가修身齊家 절차탁마切磋琢磨
가업의 경영과 처사處士로서의 삶
-윤두서의 노비관과 실학사상
근기 남인을 대표한 경화사족들의 모임과 학풍
고학古學,고화古畵,화보畵譜
예학禮學,박학博學,서학西學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

제3장 윤두서 예술의 성취와 특징
새로운 회화의 모색: 상고尙古와 혁신革新
-[고씨화보]와 [당시화보]
-시서화 삼절三絶과 시의도詩意圖
계지술사繼志述事와 자식의 훈도
-[가세유사]家世遺事와 [영모첩]永慕帖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
-[가전유묵]家傳遺墨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종장宗匠

제4장 삶에 대한 기록과 정리
전원에서의 실천적 삶과 [기졸]
현실주의, 실득實得 및 사생, 그리고 풍속화
세상사에 대한 관조와 남종화
-윤두서와 전각
우국충정憂國衷情과 갑작스런 죽음
윤두서에 대한 평가와 후대에 미친 영향
나가는 말

부록
윤두서 가계도
윤두서 연보
[기졸]에 실린 시문의 연대별 목록
윤두서 작품 목록
도판 목록
참고문헌

 

윤두서의 대표작들

자화상
이 작품에서 윤두서는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묘사된 풍성한 수염과 살짝 올라간 눈매에 약간 살집이 있고 다소 불그레한 혈기를 보이는 얼굴로 마치 씩씩한 장수처럼 보인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정면상으로 그린 점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을 구사한 최초의 영정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경답목우도耕畓牧牛圖
윤두서는 풍류적인 산수유를 즐긴 뒤 이를 담아내는 방식의 진경산수화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이 작품과 같이 풍속화의 배경으로서 실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산수화에 목가적인 전원 풍경과 농경 장면을 재현한 풍속화로서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농부와 목동, 풀을 뜯는 소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정교한 필묘와 다양한 먹색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채과도菜果圖와 석류매지도石榴梅枝圖
여러 과일을 그릇 안에 담아 놓고 그린 이 작품들은 서양화에서 유래된 회화의 개념과 기법을 일찍이 도입한 사례에 해당한다. 정교한 필묘를 구사하는 한편 그릇의 요철감을 강조하기 위해 음영법을 사용하여 사실감을 높였다. 이처럼 윤두서가 진취적으로 수용한 서양화의 개념과 기법은 이후 조선 후기 화단의 주요한 경향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윤두서는 말 그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에서는 말의 모습에서 미묘한 생기가 느껴지며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버드나무의 묘사도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말의 생태와 특징을 잘 포착하고 빼어난 사생성이 가미되어 말 그림에 있어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상태임을 보여준다.

나물 캐는 여인
엄격한 남녀유별이 지켜지던 사회에서 사대부 남성이 서민 여성의 뒷모습을 그린 풍속화로, 주제적인 측면에서 파격적인 작품이다. 생업의 현장에 대한 윤두서의 관심과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점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여성의 모습과 자세 등이 관찰을 통해 획득된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본문중에서) 윤두서의 대표작들

 

박은순 [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학술위원회 위원, 역사학회 이사, 온지학회 부회장, 한국미술사학회 및 미술사연구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미술사학회 총무이사 및 이사, 문화재청 및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 뉴욕주립대 연구원 및 강사, 일본 세이조대학교 객원교수, 도쿄대학교 외국인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 [금강산 일만 이천 봉](보림, 2005),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화가 정선](나무숲, 2002), [금강산도 연구](일지사, 1997)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학술위원회 위원, 역사학회 이사, 온지학회 부회장, 한국미술사학회 및 미술사연구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미술사학회 총무이사 및 이사, 문화재청 및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 뉴욕주립대 연구원 및 강사, 일본 세이조대학교 객원교수, 도쿄대학교 외국인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 [금강산 일만 이천 봉](보림, 2005), [진경산수화를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