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이카로스의 날개 2013. 7. 16. 22:51

 

 

 

 

올 전반기에 읽는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저 : 채운 ㅣ 출판사 : 북드라망 ㅣ 발행일 : 2013년 05월20일

 

 

인상깊은 문구 인상 깊은 글들이 너무 많아 다 적지 못한다...

 

- 코드화되지 않은 것들, 식별불가능한 힘들의 포착과 감지요, 새로운 언어의 용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 남의 글을 베길 것인가. 이 질문이 함축하는 바는 이렇다......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 벌레와 붕 모두 현실의 지층에 포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유하고 지배적 가치를 회의한다는

점에서, 극대와 극미는 이렇게 통한다.

 

- 그리고 이옥, 그도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그랬던가. 회개하는 자는 이중으로 불행하거나 무력하다고.

 

- 이야기 어디에도 지루한 교훈이라든가 고원한 도학적 이념은 없다.

 

-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나를 빌려 짓는다!

 

- 유감스러운 것은 창힐이나 주황이 이미 일찍이 우리를 위하여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않았고, 단군이나 기자도

일찍이 글로서 진작부터 말을 가르친 적이 없는 것이다.

 

- 이옥에겐 지식인으로서의 거창한 사명감도... 그저 한없이 작아져서, 벌레가 될 때까지 작아져서, 방향을 비틀었다.

'서툴고 가냘프고 경박하고 비뚤어진' 걸음으로 모래와 바람 속을 기었다.

 

- 이 단호하고도 오싹한 인간중심주의! 다산의 논리 속에는 이옥에게서 보이던 갈등과 고뇌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일치하는 자들은 자신의 시대를 볼 수 없다. 자신의 시대를 보려면 시대를 거슬러야 한다.

 

-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체험하는 자에게는 어둡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란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자,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그며 써내려 갈수 있는 자다"(아감베[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 아아! 이는 아는 자와 더불어 말할 뿐이고, 알지 못하는 자와는 말할수 없는 것이다.(김려)

 

- 전사나 벌레가 사막을 뒹굴어야 하는 건 똑같다. 전사의 고독이 벌레의 고독보다 더 숭고하고 강도 높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수 없다.

...사막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 모두가 위대하다.

 

- 곧 천지만물이 그것을 짓는 자의 꿈에 의탁하여 그 상을 드러내고, 기에 나아가 정을 통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 '천지만물의 번역자'로서의 작가가 무한히 반복되는 이 차이를 놓칠 리 없다.

 

- 탁 트인 요동벌판을 마주한 연암이 "크게 울어 볼 만하다"고 외치고는...

 

- 이제, 이옥을 읽을 시간이다.

 

 

 

 

가장 조용하고 가장 정적인, 하지만 가장 강렬한
나의 글이 나의 저항이다!
-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달랐던 글쓰기의 달인 이옥을 읽는다

섬세한 관찰과 감수성의 소유자, “붓 끝에 혀가 달렸다”라고 할 만한 글재주꾼. 관운은 꽉 막히고, 세심한 성격에 그저 글쓰는 재주 하나. 그러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 하나는 제대로 갖춘 외골수 아티스트. 흡사 문학한다는 친구들이 종종 그러하듯, 그는 평소에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술자리에 가면 반드시 만날 수 있는 그런 유다. 물론 어울려 떠드는 성격은 아니다. 그저 말없이 구석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댈 뿐이다. 그러나 그날 술자리의 분위기라든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특징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다가 글 곳곳에 풀어 놓는다. 세상이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앞장서서 개혁을 외치는 그런 유의 인간도 아니다. 뒤에서 소리 없이, 자신이 쓸 수 있는 걸 쓸 뿐이다. 원하는 게 별로 없으니 타인의 시선이나 평판에 휘둘릴 리 없고, 구차하게 사느니보단 아무것도 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오로지 읽고 쓰는 일, 그게 전부인 자.
(/ pp.36~37)

 

이 사람이 바로 이옥(李鈺, 1760~1815)이다. 18세기 말 조선의 문장가, 간혹 ‘문체반정의 희생자’로 혹은 조선 후기 ‘여성적 글쓰기’의 표본으로 그를 떠올리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잊혀진 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성장과정이라든가 사승관계, 교우관계를 뚜렷이 알려주는 기록이 거의 없다. 알려진 것이라곤 효령대군 11대손, 당색은 소북(小北), 벗으로 1797년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된 김려(金?)와 강이천(姜彛天)이 있다는 것 정도. 서자(庶子) 가문에서 태어나 칠전팔기 끝에 간신히 과거에 합격했으나 답안지에 새로운 문체인 ‘소품체’(小品體)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당시 군주였던 정조(正祖)의 화받이가 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며 “오로지 읽고 쓰는 일”만 하였음에도 스스로 변변찮은 문집 하나 정리해 놓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지금 우리가 그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절친, 김려 덕분이다. 이옥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우태)이 김려에게 들고 온 원고뭉치를 김려가 일일이 필사하고 편집하여 자신의 문집 [담정총서](潭庭叢書)에 끼워 넣었던 것. 1970년대에야 이옥의 글이 겨우 번역되기 시작했기에 아직은 그에 대해 밝혀진 사실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니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 하나는 제대로 갖춘 외골수 아티스트”와 같은 새로운 이름으로 그를 호명하는 자리도 아마 이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가 처음일 것이다.

 

이 책은 200여 년 전 조선의 한미한 유생(儒生) 이옥이 일으킨 ‘감수성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감수성이란 단순히 어떤 마음의 상태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코드화되지 않은 것들, 식별불가능한 힘들의 포착과 감지요, 새로운 언어의 용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p.21) 이 새로운 기운, 감수성이 흘러넘치는 이옥의 글을 정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옥은 내쳐짐과 동시에 잊혀졌다. 하지만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이옥 본인이 전적으로 의도한 바도 아니었으나 이옥으로부터 시작된 ‘감수성의 혁명’은 시대를 거슬러 ‘글쓰기와 반시대성’이라는 “고래”("책머리에"의 이누이트족 고래사냥 이야기 참조)가 되어 지은이 채운을 찾았다.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날 찾아온 고래를 그냥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던 이 글쓰기(책)는 “그(이옥)가 애처로운 희생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삶의 부침 속에서 보여 준 기이한 용기,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일관된 어떤 태도가 주는 묘한 감동”(/ p.188)에서 비롯됐다.

내 스타일 대로 쓰라는 정조, 내 멋대로 쓰겠다는 이옥


이옥의 “일관된 태도”란 끝내 회개하지 않은 것. 주지하다시피 “순정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정조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옥은 정조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p.40) 이것이 그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양이라 부르는 이유다. 정조는 이옥의 소품체를 세 번이나 지적하고 그때마다 그에 따른 벌과 그의 문체를 고치기 위한 숙제를 냈지만 별무소용. “이옥은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시대의 균열인 채로, 소요와 불안의 상태로 머물렀다.”(/ p.46) 정조가 가장 참을 수 없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조 스스로도 감지한바, 조선왕조의 근간이 되어 온 주자학적 질서는 명의 몰락에서부터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청으로부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사상과 문장을 담은 책들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를 받아들인 지식인 사이에서도 새로운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 욕망이 여기저기서 새로운 글쓰기로 표출되고 있던 가운데 정조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감지했고 그럴수록 그것을 지속시키려 매달렸다. 이 와중에 마침 한미한 유생 이옥이 정조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소품체 구사자의 최후’라는 시범 케이스가 됐던 것.
정조가 자신을 ‘찍었거나’ 말거나, 과거를 볼 수 없게 되고 충군(充軍)의 명에 따라 사실상 유배를 가게 되었거나 말거나, 해배가 되었거나 말거나 그래도 이옥은 쓴다. 정조가 쓰라는 대로가 아닌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또 보라는 대로가 아닌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사실 그는 그것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가 벌레, 풀, 과일, 동물 등등의 천지미물과 교감하며 그것에 대한 기록을 남긴 [백운필](白雲筆)의 서문에서 그는 바깥으로 가고 싶지만, 자고 싶지만, 글을 낭독하고 싶지만, 책을 읽고 싶지만,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길게 나열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능력은 곧 새로운 능력으로 반전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다른 글쓰기를, 다른 표현을 모색하게 하는 것.”(/ p.260) 그는 ‘부득이하게’ 새, 물고기, 짐승, 꽃, 벌레, 곡식, 과일, 채소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어떤 주제나 교훈, 사상적 깊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없이 가볍다. 자신이 속해 있던 지반을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진 셈.

 

글쓰기, 나를 버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
눈에 보이지 않는 성리의 세계보다는 눈앞에 날아다니는 벌레나 마당의 풀을 노래했던 그였기에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명색이 사대부인 그가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은 한마디로 ‘시정잡배’들이다. 한밤중에 통곡을 했다는 북방의 기녀며 도둑, 사기꾼, 남사당패, 바둑을 잘 두는 사람, 위조화폐를 만드는 사람, 거렁뱅이 음식평론가 등등. 유배 중에도 끊임없이 ‘목민관’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냈던 다산과 달리, “이옥은 유배 중에 듣고 본 마이너리티의 삶을 통해 ‘남성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워 나간다.”(260쪽)
‘남성 지식인’의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한 그가 도달한 지점은 ‘정’(情)과 ‘욕’(欲)의 세계. 그는 말한다. “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 p.114, [이언]俚諺 중 "이난"二難)고. 이옥이 도발적인 것은 지금-여기에서 발하는 정을 중시할 뿐, 여느 사대부들처럼 본연지성의 회복이나 순선치 못한 정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여 그는 유교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오십대 퇴기와 이십대 청년의 로맨스를 기록하고, 시집갈 날을 받아놓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노처녀의 마음을 묘사하고, 남편을 아홉이나 둔 여자에 대해 적어 둔다. 존재를 뿌리째 흔드는 욕망과 함께 작동하는 정의 세계는 이념과 대의라는 구심점으로 운동하는 남성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남성 지식인’의 영토에서 탈주한 이옥은 가볍게 여성의 영토로 건너가 스스로 ‘여성-되기’를 자처한다. 그는 결코 어느 한 점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수숫대 속 벌레가 되기도 하고, 거미나 벼룩, 가라지나 배추가 되기도 하며, 시장의 협잡꾼도 되었다가 난봉꾼의 아내가 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갖고 태어난 모든 정체성을 지우고, 모든 생성 중인 삶에 자신을 던지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썼다.”(/ p.261) 지은이 채운의 표현처럼 그렇게 이옥은 “아무도 아닌 자, 그러므로 모두인 자”(/ p.113)가 된다.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조선이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18세기 말 정조 시대, 연암과 다산처럼 한 시대를 온전히 밝혀낸 별들과 달리 이옥이라는 별은 작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를 빼놓고는 1792년의 문체반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문체반정은 반드시 이옥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문체반정은 군주의 정치권력 행사가 아닌, 조선의 전통적 글쓰기 담론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징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옥은 그 낡은 글쓰기로부터 미세하면서 재빠르게 또 끝까지 도주하면서 문체반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조에게 빌지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또는 자기 글의 정당성을 따지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쓸 뿐이었다. 북쪽 변방의 기녀가 한밤중 통곡한 사연에 대해, 옥심·향심처럼 ‘심’(心)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경상도 지방 여인들의 이름에 대해, 꿈틀거리는 벌레와 매미의 울음에 대해, 도둑들의 은어에서부터 집 앞마당의 잡초나 자신이 좋아하는 상추쌈과 날마다 다른 맛을 선사해 주는 담배, 굽이치는 계곡물, 송광사의 오백나한에 대해... 그는 자신이 격(格)하지 못하는 성리(性理)의 세계를 남들 어깨 너머로 베껴 쓰느니 자신이 감(感)한 세계에 대해서만 쓰기로 했다. “기뻐하고, 아파하고, 죽고, 울고, 웃고, 버림받고, 사랑하고, 원하고, 원망하는 이들의 삶”(/ p.293)에 대한 자신의 공감(共感), 그것이 그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그의 저항은 반시대성과 이어진다. “반시대성이란 단지 시대에 반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기 시대로부터 질병의 징후를 읽어내는 민감성,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공감”(/ p.289)을 의미하므로. 또한 그것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동시대성과도 통한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고자” 한 욕망, 그것이 이옥을 자유롭게 그리고 저항하게 했다. 이것이 우리가 이옥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쓰는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필연성을 믿기 위해서? 그런 믿음이 필요하다면 굳이 읽고 쓸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쓰는 것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가 ‘최선의 시대’임을 거부하기 위해, 아니 ‘최선의 시대’ 같은 게 있을 거라는 믿음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는 읽고, 또 쓴다. 나는 그러기 위해 이옥을 읽는다.(/ p.188)

어떻게 쓸 것인가, 너의 글을 쓸 것인가, 남의 글을 베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사회가 파 놓은 홈대로 살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200년의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도달한 이옥의 진정(眞情)이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책머리에

프롤로그, 이옥과 우리

1부,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호모 스크립투스의 자화상
용서받지 못한 자 - 이옥의 문체반정 수난사
이옥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정조와 문체반정
피도 눈물도 없이 - 글쓰기와 주체화 과정
세상의 끝에서 세상을 만나다 - 유배와 여행
너는 내 운명 - 김려, 이옥과 더불어 불멸하다

2부, 욕망의 글쓰기, 글쓰기의 욕망
글쓰기의 모든 어려움 - [이언]의 세계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 첫번째 도주선, "일난"
애정만세 - 두번째 어려움, "이난"
낮은 목소리들 - 세번째 어려움, "삼난"
네 멋대로 해라 - 고문과 금문의 변증법을 넘어
취하고 토하라 - 독서론과 문장론

3부, 카메라를 든 사나이 - 낯선 세계로의 여행
금지된 장난 - 빠지다, 미치다
인섹토피디아,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
사물들 사이에서 나를 잃다 - 인간주의를 넘어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형용사의 세계, 부유하는 시선
[연경], 만국의 흡연자들에게 보내는 우정의 서

4부, 경계에서, 연대하라
생활의 발견 - 삶들, 이야기들
마이너리티 리포트 - 길 위의 인생들로부터 배우다
마음의 헤테로토피아 - 정과 욕을 허하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여성-되기와 글쓰기
징후와 세기 - 동시대적 공감과 반시대적 글쓰기

에필로그, 이옥의 글쓰기, 세상과 공명하다
참고도서
찾아보기


 “18세기 문체반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었던 자, 그러나 완벽히 주변화되어 잊혀진 자 이옥.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대략 1815년 즈음,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지금 이 자리. 이옥으로 하여금 200년이라는 시공간의 거리를 훌쩍 내달려 지금 여기에 도달하게 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잔존(殘存)의 저항’이라 명명한 그것을, 이옥의 글에서 건져 올리고 싶었다. 하여, 중력의 무게와 휘황찬란한 빛 속에서 휘청거리는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이옥의 글쓰기가 보여 주는, 반딧불처럼 미미하지만 매혹적인 빛을, 먼지처럼 가벼운 춤을 선물하고 싶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이옥에게 물은 ‘격’(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感)해야 할 것이다. 문장은 감응의 능력에서 나온다. ‘격물치지’라는 성리학의 가르침은 감응하고 ‘취토’하는 강렬한 파토스로 전환된다. 진리는 언제나 저 높은 곳이나 저 깊은 곳에 있는 무엇으로 상상된다. 이로부터, 표면 위에 있는 것들은 저 높은 곳을, 혹은 저 심층을 향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된다. 하지만 이옥은 지천에 널린 풀을 얘기하고 벌레를 얘기하고 꽃과 나무와 채소와 과일을 얘기한다. 그의 시선은 저 높은 곳을 향하는 법이 없다. 심오한 마음의 세계를 향하는 법도 없다. 그저 하늘과 땅 사이에 펼쳐진 것들에 대해, 그 세계의 웅성거림에 대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 말할 뿐이다. 그는 격자화될 수 없는 세계의 실상을, 예측 불가능한 대기현상처럼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세계의 아우성을 보여 준다. 진리와 질서야말로 관념이고, 세계는 무선무악(無善無惡)인 채로, 무질서한 채로, 너저분한 채로, 움직이는 채로, 비합리적인 채로, 경계를 넘쳐 흐르며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나의 법칙이 관통하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라 입구와 출구가 여러 개인 미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참되고 참되다”

“이옥은 태평성대와 왕도정치를 꿈꾸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건 너무나 벅찬 짐이다. 짐을 짊어질 수 없다면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이옥은 한껏 가벼워지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한다. 그의 글쓰기가 보여 주는 한없는 가벼움을 나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 슬프고 우울한 정조를 표현할 때조차 그의 글쓰기가 살랑거리는 듯한 것은, 그가 오로지 글쓰기를 통해서만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미친 반 고흐는 미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우울한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함을 치유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이옥. 버림받은 이옥은 사물들과 공감하고 사물들 속에서 자신을 잊기 위해 글을 쓴다. 한 줌의 세속적 욕망과 결별하기 위해 글을 쓴다. 쐐기풀 같은 고통. 그러나 그 고통마저 끌어안게 만드는 글쓰기의 이상한 기쁨.”
(/ '본문' 중에서)


 

채운 [저] 

1970년생. 글쓰고 강의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공부를 해서 뭘 할 수 있냐, 공부를 하면 뭐가 좋으냐고. 이제 알 것 같다. 공부는 뭘 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모든 것임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고 기쁨이다.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근대가 화두였다. 근대를 좀더 멀리서 조망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동서양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신천지를 만난 듯했다. 이 공부를 언제 다 하나 싶은 막막함과, 평생을 공부해도 지루하지 않겠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이때부터가 내 공부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겠다. 천지가 공부할 것들로 가득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부할 게 없어서 지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동서양 담론들을 횡단하면서 텍스트를 재독해하고, 개념과 사유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래도 함께 공부하는 스승과 벗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저작으로는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재현이란 무엇인가], [느낀다는 것]이 있으며, 남산강학원 친구들과 함께 [고전 톡톡]과 [인물 톡톡]을 기획하고 썼다. 옮긴 책으로 [에드바르 뭉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