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책

완역 이옥전집 2 :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

이카로스의 날개 2015. 5. 13. 21:06

 

 

 

 

 

 

 

완역 이옥전집 2 :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

이옥 (지은이) |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긴이) | 휴머니스트 | 2009-03-09 

양장본 | 528| 223*152mm (A5) | 951g | ISBN : 9788958622758

 

 

인상깊은 문구

 

- 노자는 "큰 간신은 충신과 비슷하다."

 

- 가라지도 풀이요, 곡식 또한 풀이다... 어찌 풀에게서 피차 구별이 있겠는가?... 또한 이해 관계일 뿐이지. 천지의 정은 아니다.

 

- 우리나라는 자고로 협객이 없다.

 

- "차라리 삼 년 학질은 견딜지언정 하루의 한가함을 보내기는 어렵다.

 

- 땅은 만물을 낳게 하는 것인데, 낳았으면 자라게 할 뿐이지. 약초라 하여 억누르지 않고, 좋은 곡식이라 하여 후대하지 않아서

그 자연의 공효가 다 미치는 것인데, 사람이 스스로 다르게 대하는 것일 뿐이다.

 

- 소인으로 소인의 직책을 맡게 한다면 소인은 소인이 아닌 것이다.

 

- 탕宕이란 규범에서 일탈하여 막을 수 없음을 이른다.

 

 

명문이 너무 길어 짧게 옮긴다.

 

 

 

18세기 소품 문학을 풍부하게 일군 문인 이옥(李鈺, 1760~1815),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모든 글을 수록한 '완역 이옥 전집'(5)이다.

원로 국학자로서 왕성한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을 중심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과 연관된 고전문학을 함께읽고 번역 작업을 해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實是學舍古典文學硏究會)의 회원들이 함께 옮기고 엮었다.'완역 이옥 전집'은 이옥 관련 글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데다, 적확한번역, 치밀한 주석 작업, 정성을 들인 윤문 작업 등을 거쳐 번역의 질이 한층 높아졌다.

조선 후기에는 경화세족이 아니어서, 서족 출신이어서, 또는 시대를 앞서간 사유를 한 탓에 권력 체계에서 소외되어 방황하는 지식인이 대거 양산되었다. 이옥은 그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로, 특히 정조의 문체반정 강요에 시종일관 맞섰던 유일한 문인으로 유명하다.

이옥이 문제적인 까닭은 당대의 소품 문학을 했던 여러 문인 중에서도 오로지 소품문에만 진력함으로써 기성 문학의 권위에 도전하여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통속한 일상과 민간 예술, 풍속을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종래의 성리학적 사고와 순정문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통해 근대적 문학정신에 가교(架橋) 역할을 한 것은 이옥 문학에서 가장 큰 문학사적 의의라 하겠다.이옥은 18세기 소품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비껴갈 수 없는 인물로, 오늘날 그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일은 이옥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소품 문학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18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1

.

....

 

2

문여1 - 봉성문여

문여2 - 잡제

이언

희곡 - 동상기

부록 - 김려의 제후

 

3

백운필

소서

-새 이야기

-물고기 이야기

-짐승 이야기

-벌레 이야기

-꽃 이야기

-곡식 이야기

-과일 이야기

-채소 이야기

-나무 이야기

-풀 이야기

 

연경

서문

1-연초재배

2-담배의 유래와 성질

3-담배 도구

4-담배의 쓰임

 

4

1

2

3

 

 

저자 : 이옥 

최근작 : <낭송 이옥>,<이옥 문집>,<문무자 이옥 시집> 20(모두보기)

()가 기상(其相)이고, 본관은(本貫)은 전주(全州),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성균 유생으로 한양에서 활동했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족(庶族) 무반(武班) 출신이고, 부친 이상오(李常五)1754년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이옥은 성균 유생 시절인 1790년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슬하에는 14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초명은 우태(友泰).

그의 성장을 알려 주는 연보가 없어 생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저술 등을 통해서 추적해 보면, 그는 30세를 전후해 한양에서 성균 유생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1792년에 임금이 성균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내려 준 글제에 따라 지은 그의 글이 순전히 소설문체로 작성되었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런 소설문체를 유행처럼 답습했는데 정조는 당시 성균 유생들로 하여금 매일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채우게 해 문체를 바르게 한 후에 과거 시험에 나아가도록 명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바로 이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의 문집 봉성문여(鳳城文餘)추기남정시말(追記南征始末)에 의하면, 그가 성균 유생으로 있던 1796(36)에 정조가 그의 문체를 보고 괴이하다고 과거를 보지 못하게 했다가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充軍)하게 했다. 그해 9월에 다시 돌아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문체를 고치지 못해 다시 영남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충(移充) 편적(編籍)되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1797(37)에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나, 그의 책문이 근래의 격식에 어긋났다 해서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방말이었지만 과거에 급제를 했으므로 문체로 인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는 충군에 대한 청원을 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1798(38)이 되던 봄에 삼가현에서 소환 독촉이 심해지자, 형부, 병부, 예부에 들러서 청원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1800(40) 10월에 다시 삼가현에 내려가 118일 동안을 그곳에 머물고 이듬해 2월에 귀향했다.

그 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던 1801(41, 순조 1)에 그는 잠시 귀경했지만, 성균 유생 시절에 교분을 나누었던 김려(?)와 그의 아우 김선(?) 그리고 강이천(姜彛天) 등과 헤어져서 다시 본가에 돌아와 은둔자적하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접기

 

 

 

역자 :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최근작 : <역주 이십일도 회고시>,<변영만 전집 ->,<변영만 전집 -> 17(모두보기)

벽사 이우성 선생과 젊은 제자들이 모여 우리의 한문 고전을 정독하고 연구하는 모임이다. 1993년부터 매주 한 차례씩 독회를 열어 고전을 강독해왔고, 그 결과물의 일부를이향견문록》《조희룡 전집》《변영만 전집》《완역 이옥 전집등으로 정리해 출간하였다. 고전 텍스트의 정독이야말로 인문학의 기초이자 출발점임을 명심하여 회원들은 이 모임의 의미를 각별히 여기고 있다.

 

· 이우성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퇴계학연구원 원장

· 김용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김종민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

· 김진균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 손혜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 윤세순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 이신영 한국고전번역원 전문 역자

· 이현우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 장유정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강사

· 최영옥 재단법인 실시학사 연구원

· 한영규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한재표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강사

 

 

18세기 소품 문학의 결정판, 완역 이옥 전집 드디어 출간!!

이 책의 개요

 

18세기 소품 문학을 풍부하게 일군 문인 이옥(李鈺, 1760~1815),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모든 글을 수록한 완역 이옥 전집이 출간되었다. 원로 국학자로tj 왕성한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시대 실천적 지식인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을 중심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과 연관된 고전문학을 함께 읽고 번역 작업을 해온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實是學舍古典文學硏究會)의 회원들이 함께 옮기고 엮었다. 이옥 관련 글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는 데다, 적확한 번역, 치밀한 주석 작업, 정성을 들인 윤문 작업 등을 거쳐 번역의 질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에 그 활용가치 또한 크다 하겠다.

 

이옥이 살았던 18, 19세기는 소품 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다. 고문(古文)에서 발견되는 낡은 사유와 천편일률의 상투적 글쓰기에서 벗어난 소품 문학은 이제껏 다루어지지 않은 존재들, 즉 여성과 중인, 평민들을 비롯해 풀과 물고기, , 그리고 담배 같은 기호품으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의 인물 정태(情態)와 시정을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삶의 모습 그대로 묘사해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 또한 스스럼없이 표현해냈다. 이옥은 이들 소품 문학의 역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경화세족이 아니어서, 서족 출신이어서, 또는 시대를 앞서간 사유를 한 탓에 권력 체계에서 소외되어 방황하는 지식인이 대거 양산되었다. 이옥은 그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로, 특히 정조의 문체반정 강요에 시종일관 맞섰던 유일한 문인으로 유명하다. 성균관 상재생 시절, 패관문학을 버리고 순정한 문체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 정조에게 불경(不經)스럽고 괴이한 문체로 낙인찍힘으로써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이옥은 그러나 순정한 문체, 즉 고답적인 고문의 글쓰기를 결코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문학세계와 문()에 대한 자기 확신을 끝까지 관철해나갔다.

 

연암 박지원마저 정조의 문체 지적을 받고 반성문을 썼지만, 이옥은 결코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지방 군적에 편입되는 충군(充軍)을 당하고, 과거시험에 1등을 하고도 꼴찌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고문으로의 선회보다 자신의 소품문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고문을 중심에 두고 여기적(餘技的) 취미로 소품문을 쓴 연암학파나 왕명에 따라 곧장 고문으로 회기한 당시 인사들과 달리 이옥은 한평생 소품 문학에만 매진하였다. 그는 성리학적 사고에 치우친 글쓰기에서 벗어나 시속의 변화와 개인의 서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소품에서 문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창작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옥이 문제적인 까닭은 당대의 소품 문학을 했던 여러 문인 중에서도 오로지 소품문에만 진력함으로써 기성 문학의 권위에 도전하여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통속한 일상과 민간 예술, 풍속을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종래의 성리학적 사고와 순정문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통해 근대적 문학정신에 가교(架橋) 역할을 한 것은 이옥 문학에서 가장 큰 문학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

 

이옥은 18세기 소품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비껴갈 수 없는 인물로, 오늘날 그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일은 이옥 개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소품 문학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18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이제, 지금까지 발견된 이옥의 모든 글을 번역 출간함으로써, 이옥의 글쓰기와 사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라도 이옥의 문학 세계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원전 번역의 노력은 그의 문학적 가치와 세계에 대한 더 많은 연구로 이어질 것이다.

 

18세기의 문제적 문인 이옥, 그는 누구인가?

저자 소개

 

18세기의 문제적 문인 이옥(李鈺, 1760~1815)은 개인문집도 없는 데다 묘지나 행장(行狀)을 발견할 수 없어 그 생애가 매우 불분명하다. 문우와 왕복한 서신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사후 2백년이 지났음에도 이옥의 글은 체계적으로 편집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그의 가문이 한미하여 그를 발탁해줄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며, 그의 문학 성향이 소품체에 편중되어 당시 정조의 강력한 문체반정 정책에 배치됨으로써 과거 진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고, 또 이옥의 생득적 체질이 외곬으로 나가서 국왕의 요구에 굽히거나 타협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그의 글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성균관 시절부터 절친한 벗이었던 김려() 덕분이다. 그가 이옥의 글을 수습하여 담정총서(庭叢書)에 수록해 놓았기 때문인데, 이들 글이 수습된 경위는 전집 2권 부록에 실린 김려의 제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담정총서에 실린 것 외에 현재까지 발견된 이옥의 글로는 이언(俚諺), 동상기(東床記), 백운필(白雲筆), 연경(烟經)이 전해온다.

 

이옥의 집안은 한미한 무반계의 서족으로, 당색은 오래전에 권력 기반을 잃은 북인계였다. 그의 고조부는 벼락출세한 미천한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왕명으로 승적된 신분임에도 실제 통혼은 서얼 집안과 이루어졌다. 서족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는 이옥이 생을 걸고 글쓰기에 몰입한 것이나 복잡한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옥이 남긴 글과 김려의 제후 등을 통해 재구성한 그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이옥의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경금자(絅錦子) 등 여럿이 있다. 정조 14(1790) 증광(增廣)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상재생(上齋生)으로 있을 때 정조 16(1792) 응제문(應製文)으로 작성한 글의 문체가 패관소설체(稗官小說體)로 지목되어 국왕의 견책을 받았다. 유가경전에 기반한 고전적이고 격식을 추구하는 당송의 시와 고문을 제외한 패관소설체로 쓴 모든 글들에 예민하게 반응한 정조에게 시범 케이스로 지목된 것이다. 당시 그는 불경스럽고 괴이한 문체를 고치라는 엄명을 받고, 이 일로 실록(實錄)에 이름이 올랐으며,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지어 올리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정조 19(1795) 경과(慶科)에서도 문체가 괴이하다는 지적을 받고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에 이어 지방의 군적에 편입되는 충군(充軍)의 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에 편적되었다가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적되어 사흘 동안 머무르고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별시(別試) 초시에서 방수(傍首)를 차지했으나 계속 문체가 문제되어 방말(傍末)에 붙여졌고, 정조 23(1799) 삼가현으로 다시 소환되어 넉 달을 머물게 되었다. 이 귀양길의 시말에 대해 이옥은 남쪽 귀양길의 시말을 적다(전집 2164)에 자세히 적고 있으며, 삼가현에 머문 기간 동안 이 지역의 인물과 풍정에 관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전집 2권 봉성문여 참조).

해배된 이후 이옥은 더 이상 과장(科場)에 출입하지 않고 경기도 남양(南陽)에 칩거하면서 글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정조도 꺾지 못한 이옥의 독창적 글쓰기와 생각쓰기

이옥 문학의 특징 1

 

18세기 후반은 조선 중세사회의 하향기, 해체기에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 속에 농업 생산이 향상되고 상업과 수공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학술적으로는 실학이 흥성하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평민층이 대두하면서 거리에서 책 읽어주는 전기수(傳奇)나 사랑방 이야기꾼들에 의해 패사(稗史) 문학이 조성되었고, 이에 흥미를 가진 문사들이 소품체로 즐겨 글을 썼다.

 

당시 정조는 소수 특권 귀족을 견제하고 전통적 사대부들의 지지를 토대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 왕조의 정치 교화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사대부 사이에 유행한 소품체를 순정치 못한 문풍으로 보았다. , 정통 교양에 위배될 뿐 아니라 유교 경전을 바탕으로 한 왕조의 지배 이념에도 배치되며, 백성의 심성을 흐리게 하는 불순한 것으로 여겼다. 정조는 이 같은 잘못된 문풍을 시정코자 강력한 문체반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정조 문체반정의 간략한 시말이다.

 

그러나 당시 문체반정은 사람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달리 시행되었다. 정조의 사부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에게는 정조가 직접 엄하게 훈계하여 문체를 고치게 했으며, 안의현감으로 나가 있는 박지원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어르고 달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옥과 같은 한미한 문인에게는 정거와 충군이라는 가차 없는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하찮은 사물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우리 국풍과 물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옥의 글은 이덕무, 유득공의 소품문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본령을 고문에 두고 있던 이들과 달리 이옥은 고문을 배우면서 허위에 빠진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오로지 소품문 창작에 몰두하였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여러 문사들이 고문으로 돌아섰지만, 이옥은 끝내 그의 문학을 지켜나갔다. 〈《묵토향의 앞에 적는다(墨吐香前敍)를 비롯해 동상기, 백운필, 연경의 서문을 보면 이옥이 왜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다. 그에게 글쓰기는 술에 취해 토한 듯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며, 한가함을 잊기 위해 써야만 하는 글이었으며,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일지라도 서술될 필요가 있다면 곧 글이 되었다. 이렇듯 이옥에게 글쓱디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었다. 이옥에게 그의 문학은 문학의 영역을 넘어 생명 자체로, 그 어떤 무엇과도 바꾸거나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