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이야기

이상 실현은 자기희생의 고귀한 대가

이카로스의 날개 2009. 1. 15. 01:36

 

 

이상 실현은 자기희생의 고귀한 대가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돈키호테〉를 통해서 본 ‘이상’의 의미

 

돈 키호테는 이상주의자인가? 이상주의를 ‘현실적 가능성을 무시하고 이상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하는 공상적 또는 광신적 태도’라고 규정한다면, 그렇다. 돈 키호테가 목동들을 만나 늘어놓는 ‘황금시대’에 대한 장광설을 들어보면, 더욱 그렇다. 황금시대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노동의 풍요로운 수확을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구에게나 제공”했고 “모두가 평화로웠고 우애가 넘쳤으며” “진실과 소탈함 속에 사기와 속임수 그리고 악”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정의도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정숙한 여인들이 “두려움 없이 혼자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이 가증스러운 ‘철기시대’에는 “크레타의 미로와 같은 새로운 미로 속에” 여인을 숨겨둔다 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편력기사가 된 ‘진정한’ 이유다. 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미쳤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처녀들을 지키고 과부를 돕고 고아들과 빈민들을 구제”하려는 것이 돈키호테가 가진 순결한 이상이었다. 그가 떠벌린 황금시대 장광설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 출간한 〈유토피아〉의 영향을 받았다. 모어의 유토피아야말로 정의와 평등, 행복과 쾌락, 자연과 이성, 법과 덕이 추구되고 지배하는 이상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돈 키호테를 유토피아주의자로 규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돈 키호테를 생시몽, 오웬, 푸리에 같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같이 “추상적 원칙에 의해” 세계를 해석한 “잘못된 의식의 화신”으로 평가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돈 키호테의 황금시대 장광설에도 사유제산 제도를 폐지한 ‘분배의 사회주의’가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그것을 이룩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체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돈 키호테에게는 다른 이상주의자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미덕이 있다는 점이다. ‘자기희생에 의한 이상 실현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인류의 이상은 숱한 사상가, 혁명가, 종교인에 의해서 시대를 거르지 않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했다. 각각의 이유야 많다. 그러나 공통적인 원인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모두들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요구되는 희생은 떠맡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누구도 “남의 뺨에 흐르는 땀에서 제 먹을 빵을 짜내면서”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이상이란 ‘단지 꿈꾸고 바라기만 하는 공허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희생을 대가로 이루어가야만 하는 고귀한 어떤 상태’인 것이다.

 

돈 키호테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들보다 편력기사가 낫다고 강변한다. 성직자들은 “평화와 평온 속에서” 세상이 잘되라고 하늘에 기도하지만, 그들의 기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지붕조차 없는 황야에서 한여름에는 살을 태울 듯한 뙤약볕과 한겨울에는 뼛속까지 스미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며” 불의와 싸우는 기사들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한다.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땀 흘리고 애쓰고 노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편력기사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비평하며 돈 키호테를 ‘성스러운 바보’로 규정한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해석도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 전통 안에서 ‘성스러운 바보’란 예수가 그랬듯이 변화된 삶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온갖 견디기 힘든 고난을 스스로 감내하며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들을 몸소 실행하는 수도승들이다. 산정에 있는 죽은 나무를 살리려고 날마다 물을 올려다 부어주는 행위가 그 상징이다. 그들의 천진함과 바보스러움, 세상의 조롱과 무시에 대한 무관심, 순결한 이상을 위한 자기희생을 돈 키호테가 보여준다는 것이 모출스키의 생각이다.

 

블로흐도 같은 의미에서 돈 키호테를 예수와 비교했다. “예수 역시 동시대인으로부터 심하게 조롱당했지만, 고결한 이상을 급작스럽게 실천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주체가 결연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실천하려는 의지는 마치 세계의 반응이 거칠고 저열한 것만큼 그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입마다 더 나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온갖 장광설을 달고 살면서도 그 구현은 한결같이 “남의 뺨에 흐르는 땀”으로 하려는 우리야말로 진정 저열하지 않은가? 세상의 변화는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변화는 원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늙은 말을 끌어내어 황야로 간 어떤 노인에게 조롱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2월 23일 한겨레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