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감동을 읽어주는 남자>[AM7]
잊히는 순간이 죽음…그는 침묵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원정할 때였다. 대왕의 와병으로 원정이 지체되고 있는데도 혹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책임 추궁이 두려웠던 진중의 의사들은 아무도 손을 쓰려 하지 않았다. 시의(侍醫) 필리포스만은 예외였다. 그때 대왕의 부장(副將)으로부터 서판(書板) 한 장이 날아들었다. 서판에는 필리포스가 시의가 아니라 대왕을 독살하기 위해 페르시아 왕이 보낸 자객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왕은 서판을 읽은 다음 베개 밑에 감추었다. 필리포스가 탕약을 갖고 들어오자 대왕은 아무 말 없이 서판을 필리포스에게 건네 준 다음 탕약 그릇을 받아들었다. 대왕은 탕약을 마시면서 서판을 읽는 시의를 바라보았고, 시의는 서판을 읽으면서 탕약을 마시는 대왕을 바라보았다.
대왕은 끝없는 믿음과 신뢰가 실린, 전에 없이 따뜻한 시선을 필리포스에게 던지며 탕약을 마셨다. 서판을 읽은 필리포스는 부디 자신을 믿어줄 것을 간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 탕약 그릇을 비운 왕은 혼수상태에 빠져들었지만 곧 불사조처럼 원기를 되찾고 병석에서 일어났다. 대왕은 이로써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을 얻게 된다. 침묵의 힘이었다.
지난 해 8월 별세한 소설가이자 번역자이자 저술가인 이윤기의 유고 산문집 '위대한 침묵'의 표제작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생은 '불편한 진실'이란 글에서 신춘문예 '가작 입선'이 편집자들에 의해 슬며시 '당선'으로 바뀌고, '대학 중퇴'가 언젠가부터 '수료'나 '졸업'으로 바뀌는 등 호칭이 멋대로 바뀌어 불렸던 불편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한번도 '꽃'으로 피어 보지 못한 채 '잎'으로만 살았기에 한 산문집에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는 제목을 붙이면서까지 일류대 출신, 부잣집 아들딸, '얼짱', '몸짱' 아니면 득세하기 어려운 시절의 청소년들을 격려하려 했다는 고백을 털어놓았다.
선생은 말년에 양평의 2000평 황무지 땅에 1600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위대한 침묵'에는 주로 그 시절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성찰, 일상과 가족의 추억, 신화와 고전 이야기,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등을 유쾌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운 문장에 담아낸 탁월한 산문 37편이 실려 있다.
선생의 표현대로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위대한 침묵'을 하고 계시는 선생이야말로 "이렇듯 잊히지 않고 있으니, 그 떠난 자리가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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