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렇게 삼봉의 책을 읽었다....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저 :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ㅣ 출판사 : 경세원 ㅣ 발행일 : 2004년 11월20일 ㅣ 225쪽
인상깊은 문구
- 정도전은 현실적인 굴욕, 경제적 궁핍, 그리고 정신적 고독과 싸우면서 정치사회의 변혁에 대한 열망을 품고 1383년(42세)
9월에 함주막사 이성계를 찾아갔다.
- 변방무장 이성계와 정치낭인 정도전의 극적해후...'혁명은 변경으로부터'
- 그러나 정도전은 남들이 뭐라 하던 제 갈 길을 가면서 자기운명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다.
- 고금을 통틀어 백 살 넘긴 사람 없네.
이해득실을 가지고서 정신을 허비 마소.
다만 썩지 않는 사문이 있다면,
후일에 당연히 서이 정씨인 사람 나올 걸세.
2004년은 삼봉 정도전 선생이 이 땅에 태어난 지 662년, 서거한 지 606년이 되는 해이다. 57세라는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삼봉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쌓았다. 역사상 세상을 바꾼 위인들이 적지 않지만, 정치나 국방, 문화 방면의 한 축에서 위업을 쌓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삼봉은 정치, 경제, 국방, 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 조선왕조가 고려와 다른 성리학적 민본국가의 성격을 띠고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삼봉의 노력과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흔히 혁명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삼봉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혁명을 주도하고, 실제로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삼봉의 육체적 생명은 60을 넘기지 못했으나, 그의 정신적 생명은 왕조의 창업과 중흥, 왕조의 근대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휘하고 있다. 이미 그는 당대에도 ‘호걸 중의 호걸’로 평가받았지만, 왕조중흥의 영주인 정조는 그의 <문집>을 다시 정리해 주었으며, 왕조 근대화의 꿈을 키웠던 고종은 그에게 ‘儒宗功宗’이란 편액과 ‘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왕조시대를 청산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삼봉의 인기는 오히려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본인이 30여 년 전에 삼봉에 관한 연구서를 낼 때만 해도 삼봉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 안다 해도 부정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삼봉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그 인기가 대단하다. 컴퓨터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삼봉에 관한 글이 수백 개를 헤아린다. 외국에서도 삼봉 연구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의 선진적인 민본정신과 개혁에 대한 열정이 주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KBS 사극 <용의 >에서 삼봉이 좋게 그려진 것이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삼봉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다는 것은 학계로서도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이 그만큼 태평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과학과 기술이 현란하게 발달하여 왕조시대를 배우고 부러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듯싶은 오늘에도 삼봉같은 인물이 왠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불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6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삼봉을 만나서 난세를 풀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이는 또한 우리의 행운일 것이다. 2003년 개최한 제1회 삼봉학학술대회에서 <삼봉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율곡학, 퇴계학, 다산학과 어깨를 견줄만한 학자층이 지금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삼봉>이라는 말이 일반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인지되어 있는 까닭이다. 삼봉학의 첫출발이 뜨거운 호흥 속에서 열매를 거두게 되어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망외의 기쁨이었으며, 미래의 비약과 분발을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삼봉은 분명히 미래가 밝은 미완의 정치가요 사상가라는 생각을 더욱 다지면서 지난번의 삼봉학술회 결과를 수정·보완하여 책자로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다.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한영우) 2004년은 삼봉 정도전 선생이 이 땅에 태어난 지 662년, 서거한 지 606년이 되는 해이다. 57세라는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삼봉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쌓았다. 역사상 세상을 바꾼 위인들이 적지 않지만, 정치나 국방, 문화 방면의 한 축에서 위업을 쌓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삼봉은 정치, 경제, 국방, 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
조선왕조가 고려와 다른 성리학적 민본국가의 성격을 띠고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삼봉의 노력과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흔히 혁명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삼봉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혁명을 주도하고, 실제로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삼봉의 육체적 생명은 60을 넘기지 못했으나, 그의 정신적 생명은 왕조의 창업과 중흥, 왕조의 근대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휘하고 있다. 이미 그는 당대에도 ‘호걸 중의 호걸’로 평가받았지만, 왕조중흥의 영주인 정조는 그의 <문집>을 다시 정리해 주었으며, 왕조 근대화의 꿈을 키웠던 고종은 그에게 ‘儒宗功宗’이란 편액과 ‘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왕조시대를 청산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삼봉의 인기는 오히려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본인이 30여 년 전에 삼봉에 관한 연구서를 낼 때만 해도 삼봉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 안다 해도 부정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삼봉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그 인기가 대단하다. 컴퓨터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삼봉에 관한 글이 수백 개를 헤아린다. 외국에서도 삼봉 연구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의 선진적인 민본정신과 개혁에 대한 열정이 주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KBS 사극 <용의 >에서 삼봉이 좋게 그려진 것이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삼봉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다는 것은 학계로서도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이 그만큼 태평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과학과 기술이 현란하게 발달하여 왕조시대를 배우고 부러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듯싶은 오늘에도 삼봉같은 인물이 왠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불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6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삼봉을 만나서 난세를 풀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이는 또한 우리의 행운일 것이다.
2003년 개최한 제1회 삼봉학학술대회에서 <삼봉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율곡학, 퇴계학, 다산학과 어깨를 견줄만한 학자층이 지금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삼봉>이라는 말이 일반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인지되어 있는 까닭이다.
삼봉학의 첫출발이 뜨거운 호흥 속에서 열매를 거두게 되어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망외의 기쁨이었으며, 미래의 비약과 분발을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삼봉은 분명히 미래가 밝은 미완의 정치가요 사상가라는 생각을 더욱 다지면서 지난번의 삼봉학술회 결과를 수정·보완하여 책자로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다.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한영우)
최상용
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
이익주
삼봉집 시문을 통해 본 고려말 정도전의 교유관계
박홍규
전술가 정도전 : ‘공요(攻遼)’ 기도의 진상
문철영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청년기 정체성의 형성·위기·극복 과정을 중심으로
종합토론 최상용
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
이익주
삼봉집 시문을 통해 본 고려말 정도전의 교유관계
박홍규
전술가 정도전 : ‘공요(攻遼)’ 기도의 진상
문철영
정치가 정도전에 대한 역사심리학적 고찰
-청년기 정체성의 형성·위기·극복 과정을 중심으로
종합토론
'나의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각사 (0) | 2011.10.22 |
---|---|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0) | 2011.10.14 |
궁궐 장식 : 조선왕조의 이상과 위엄을 상징하다 (0) | 2011.10.11 |
삼봉집 (0) | 2011.10.05 |
윤휴와 침묵의 제국 (0) | 2011.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