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책

공자 최후의 20년

이카로스의 날개 2010. 4. 17. 23:31

 

 

 

공자 최후의 20년

유랑하는 군자에 대하여

저자 왕건문 지음 | 이재훈, 은미영 옮김 | 김갑수 감수 출판사 글항아리 2010-02-22 출간

 

 

인상깊은구절

 

-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공자는 한편으로는 최고의 몽상가이기도 했다.

그의 역경과 고뇌는 꿈과 현실의 부조화에서 온 것이다.

 

-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커서 ‘좌절’하고 ‘유랑’ 할수밖에 없었던 공자.

너무나 푸른 공자의 이상은 그가 살던 ‘시대의 상황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시대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시대와 맞지 않는 꿈을 꾸었기에 공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다”는 공자의 태도는 그의 일생의 이야기에

위로할 수 없는 비극적 의미를 더욱더 추가했던 것이다.

 

-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작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고 싶다.

 

-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꿈을 좇았기 때문에 공자는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찾고 떠나고, 다시 찾고, 다시 떠나고...

 

- 화이부동 : 사이좋게 지내되 휩쓸리지 않는다.

 

-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지었으면 기도할 곳이 없다.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면 하늘이 외면하리, 하늘이 외면하리..

 

- 자기를 굽히는 자는 남을 곧게 할수없다.(맹자)

 

- 나의 도가 끝났구나.

 

- 군자는 곤궁해도 도를 지키고 도를 실천하지만,소인은 곤궁해지면 닥치는 대로

행하면 탈선하게 된다.

 

- 사야! 순전히 농사만 짓는 농부가 열심히 씨를 뿌렸는데, 뿌린 것 모두를 거둘 수

있겠느냐? 훌륭한 장인이 만든 정교한 작품이라도 모든 사람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군자가 도를 통달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기용되는 것은 아니다.

 

- 평생 동안 시대와 맞지 않았지만 전력을 다해 시대와 맞선 싸운 사람이 여기에 묻히다.

 

-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한 사람이 2500년 전

“하늘이 나를 버렸다“, ”나의 도가 끝났구나“,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며

결국 자신의 꿈이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슬픈 울음소리라는 것을 어쩔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 나는 하늘은 원망하지 않는다. 사람은 더욱 탓하지 않는다.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서 위까지 도달했으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아마도

하늘일 것이다!

 

- 공자는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면서 시대와 운명에 무릎을 끓으려 하지 않았다.

 

- 세상은 불합리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은 왜곡된다.

이런 불완전한 세상이 완전해지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한 사람의 인격과

인생의 경지를 완전하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아니 자기 자신만 책임질수 있는 법이다.

 

- 나의 도가 끝났다.

 

-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시도

 

- 가슴 가득 이상을 품고

 

- 공자는 몽상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였다...그러나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볼때, 공자는 철저한 실패한 삶을 마쳤다.

그는 끊임없이 기다리고 초조해하고 희망하며 또한 좌절했다.

 

- 공자가 비록 현실 정치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동중서나 사마천과 같은

후세 유학자 들에게 공자가 쓴 춘추는 여전히 [천하의 표준]이고 [왕의 법] 이었다.

 

- 도를 천하에 행하는 것

 

- 60세가 되기 전의 공자는 시종 완고하게 운명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또 이 세상이 철저하게 무너지기를 원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 시간은 흘러가고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소.

 

- 나를 알아주는 자, 하늘밖에 없구나.

 

 

 

 

 

 

공자가 유랑생활을 시작한 55세부터 타계하기까지의 과정을 최초로 조명한 『공자 최후의 20년』. 선진시대를 연구하는

대만의 주목받는 연구자인 저자, 왕건문은 동료 학자들과의 공자읽기 모임에서 "왜, 공자는 20년이란 기간을 떠돌아야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이 책을 집필하였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길에 들어서는 데서부터 시작해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역경과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인간 공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논어>의 중요한 구절들을 새로운 관점, 지극히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공자의 마지막 20년 삶을 본격 조명한 책. 그와 초기 제자들 간의 사상적, 정치적 갈등, 현실적 좌절에서 오는 공자 내면의 번민과 흔들림을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해 꼼꼼하게 분석하였다. 또한, <논어>를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할 수 기회를 제공한다.

 

"공자 최후의 20년"

저자소개저자 왕건문 王健文

대만 화련花蓮 출생. 대북臺北에서 학업을 마치고 결혼한 후 대남臺南에 정착했다. 대만대 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 역사학연구소에서 선진先秦시대 사상과 사회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사월간』 편집부 편집, 청화淸華대 공동학과 겸임강사, 중원中原대 공동학과 겸임강사,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초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성공成功대 역사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전국시대 제자백과의 고성왕전설과 그 사상사적 의의』『고대 중국의 ‘국가’ 개념과 그 정당성의 토대』, 『중국문화사』(공저) 등이 있다.

 

역자 이재훈

고려대 동양사학과와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중국어 통역과 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노자, 인생을 말하다』 『13억의 충돌』 등이 있다

 

역자 은미영

경북대 중문과와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으며 북경제2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감수 김갑수

성균관대 및 동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국민대·경기대·성균관대 등의 강사를 지냈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전임연구원 및 산동사범대학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호서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 『장자와 문명』 『노자의 도덕경』 『마음이 담긴 동양예술 산책』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공저) 『가치청바지』(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동양의 자연과 인간 이해』 『장자를 읽다』 『장자 멘토링』 등이 있다.

 

"왕건문" 통합검색 결과보기 목차화보 / 감수의 말 / 머리말

제1장 꿈

제2장 유랑

제3장 좋은 값을 쳐줄 사람을 기다린다

제4장 광야의 소리

제5장 나루는 어디에 있는가

제6장 최후의 좌절

제7장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역부족일 따름입니다

제8장 죽은 자를 애도하다

제9장 공자의 두 세계

맺음말 _ 공자의 계수나무를 보라

초판 서문 _ 빨간 풍선을 찾아서

공자 연보 / 참고문헌 / 그림 출처

 

『공자, 최후의 20년-유랑하는 군자에 대하여』는 공자가 유랑생활을 시작한 55세(BC 497, 노나라 정공 13년)부터 73세로 타계(BC 479, 애공 16년)하기까지 약 20년의 기간에 초점을 맞춰서 공자의 삶을 다시 조명한 책이다.

저자 왕건문은 선진시대를 연구하는 대만의 주목받는 연구자이며, 그는 지난 1990년대 동료 학자들과의 공자읽기 모임을 오랜 기간 주도하다가 “왜, 공자는 그렇게 긴 세월을 떠돌아야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뒤 수년간의 연구 끝에 지난 2001년 이 책(원제: 流浪的君子-孔子的最後20年)을 펴냈다. 이 책은 치밀한 사료분석과 공자 내면에 대한 뛰어난 추적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중국 본토 굴지의 인문학 출판사인 삼련三聯서점에서도 출간된 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성인군자로서의 공자가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이자 실패한 정치가로서의 공자를 조명한다. 계속되는 제후들의 냉대, 오랜 기간의 떠돌이 생활에 지친 제자들의 항변, 초기 제자들이 현실 정치계로 입문해 고위관료가 되며 타협하는 와중에서도 애초에 품었던 높은 도道의 이상을 놓지 않았던 공자의 모습을 여러 사료를 동원해서 세밀하게 복원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특히 저자는 ‘확고한 공자’가 아닌 ‘흔들리는 공자’에 초점을 맞춘다. 공자와 초기 제자들이 광야를 떠도는 과정에서 빚은 인간적인 갈등을 탁월하게 분석했는데, 자로와 자공은 물론 공자의 분신이라 일컬을 만한 안회 같은 애제자들과 공자의 심리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비틀비틀하면서도 정도正道를 걸어간 공자의 ‘어지러운 행적’을 복원했다. 또한 『논어』를 통해 공자의 어록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좌절과 고뇌를 읽어내고 있다. 잘못 알려진 공자에 대한 신화를 낱낱이 해부함으로써 공자의 올바른 역사상歷史像을 재구성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50대 후반 이후, 고난과 역경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 공자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어』의 중요한 구절들을 새로운 관점, 지극히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공자와 초기 제자들 사이의 갈등을 매우 탁월하게 분석했다

사실 이 점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공헌이다

 

공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해석자의 이념이나 염원을 기준으로 본 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자의 지평에서 본 역사적 사실로서의 공자이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감수자 김갑수 교수는 이 책의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하나의 사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하여, 혹은 한 가지 자료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하여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지은이의 이런 진지하고도 성실한 태도는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공자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둘째, 현실에 대한 좌절에서 오는 공자의 내면에 대한 추적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즉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고서는 “너무 흥에 겨워 손과 발이 저절로 춤을 추게 된다[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고 했지만, 지은이는 『논어』에서 공자의 좌절과 고뇌를 읽어낸 것이다.

셋째, 공자와 초기 제자들 사이의 갈등을 매우 탁월하게 분석해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공헌이라고 할 만하다. 공자와 제자, 혹은 공자 제자에 대한 연구 성과는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사상적·정치적 노선의 분기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 것은 이 책 외에는 본 적이 없다.

 

공자의 생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것이 주조이지

알아주었는데 다른 이들의 방해로 저지된 것은 아니다

 

◆ 철저히 해부되고 비판되는 공자의 신화神話

사마천의 『사기세가』 도마에 오르다

 

「공자세가」를 보면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활약하면 노나라가 부강해질 것을 걱정했다고 씌어 있다. 그리하여 노나라를 혼란하게 하고자 미인을 노나라에 보낸다. 노나라 왕과 계환자가 미색에 빠져 나랏일은 뒷전이 되자 공자는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런 논리는 아마도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고 하겠다.”(56쪽)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또한 저자는 공자가 협곡 회담을 주도해서 제나라로부터 운?, 문양汶陽, 귀음龜陰 땅을 돌려받았다는 「공자세가」의 기록이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자료를 통해 이를 증명해 나간다.

먼저 「공자세가」를 보면 정공 10년 봄, 노나라와 제나라가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나 제나라 대부 여서가 경공에게 “노나라에서 공자를 중용하면 제나라에 큰 해가 될 것”이라고 말해 협곡에서의 회담이 추진된다. 영화 <공자>에 묘사되었듯이, 경공은 협곡에서 노나라를 압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공은 회담에서 돌아온 뒤 자신이 공자보다 도와 대의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예전에 노나라에서 빼앗은 세 땅을 돌려주게 된다. 여기까지가 「사기세가」의 기록이다.

『좌전』도 약간 다르지만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땅의 일부를 돌려준 것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저자는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땅의 일부를 바쳤다면 이것은 순전히 외교적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나라 왕이 순전히 도덕상의 수치심 때문에 순순히 땅을 바쳤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 또한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제나라가 강대국이었고 노나라는 약소국이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짧은 몇 년 사이에 제와 노의 입장이 바뀌고 제나라가 노나라에게 합병될까 걱정해서 땅을 내주고 화친을 청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료는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저자는 사마천이 제나라가 땅을 내준 일을 노나라 정공 14년(BC 496)의 일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것은 ‘타삼도’가 실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 정공 13년(BC 497)이다. ‘타삼도’ 사건 이후 공자는 계환자의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 「사기세가」에는 공자가 국정을 도운 지 3개월 만에 고기를 파는 상점들은 함부로 가격을 올리지 않았고 남녀가 길에서 구분하여 걸었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았으며 관광객이 넘쳐났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 힘들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계환자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공자가 건의한 것은 3개월 동안은 그대로 시행되었다”와 같은 좋은 시절은 결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60세기 되기 전의 공자는 시종 완고하게 운명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끊임없이 현실 속에서 정치적인 출구를 찾으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세상이 철저하게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때까지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되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몇 년이 지나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진나라에 있던 공자는 “돌아가자! 어서 돌아가자! 고향의 어린 제자들은 뜻은 높으나 재능이 부족하고, 비록 학문의 성취는 볼 만하지만 바르게 활용할 줄은 모르는구나”(『논어』「공야장」)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마천은 공자가 이렇게 탄식한 시기가 계환자가 죽어 계강자가 대를 잇고, 염구가 노나라로 돌아와 중용되었을 때로 보았다.(77쪽)

 

◆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것이지[莫己知]

알아준 다음 저지당한 것은 아니다

 

「사기세가」에서 사마천은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계환자가 중병이 들어 죽기 직전에 공자를 내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아들 계강자에게 공자를 높은 자리에 등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계강자가 유언을 받드는 과정에서 공자의 제자 염구를 중용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애공 3년(BC 492)의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볼 때 염유는 애공 6~7년까지는 공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실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계환자의 유언 때문이 아니라 염유·자로 등 공자의 제자들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며, 시기는 애공 11년 겨울이다. 따라서 계환자가 유언을 남겨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게 한 것이나, 이후에 공지어公之魚가 이를 저지한 일들은 후세의 유학자들이 지어낸 ‘공자 신화’라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나아가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등용하려 하자 안영이 막은 일, 초나라 소왕이 중용하려 하자 영윤자서가 막은 일 등도 위와 같은 ‘신화’의 반복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공자의 일생은 아무래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莫己知]’이 진정한 주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알아준’ 다음에 저지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가 없는데 어떻게 도를 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었다. 공자는 『논어』의 「헌문」「태백」「공야장」「위령공」 등 여러 편에서 도가 있을 때와 도가 없을 때 군자의 처신에 대해 언급했다. 그 핵심은 바로 “곧구나 사어史魚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처럼 곧더니,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처럼 곧구나. 군자로다! 거백옥?伯玉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을 맡더니,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재능을 거두어 감출 줄 아는구나.”라는 문장에 잘 나타난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신하가 군주를 쫓아내거나 살해하는 일이 밥먹듯이 일어났다. 따라서 도가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공자는 사어와 거백옥을 칭찬했지만, 자신은 사어처럼 행동하지 못했고 “행동은 대담하되 말은 공손해야 한다”“뒤로 물러나 수습하여 잘 간직해야 한다” 등 평소 자신이 말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다. 저자가 보기에 50세 이전까지의 공자는 그리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50세 이후의 공자는 도를 행할 기회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짧은 기간 정치에 몸담았지만 ‘타삼도’의 계획이 무산된 뒤 정계에서 추방되어 14년의 주유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에도 공자는 끊임없이 정치를 해보고자 시도했다. 그 모든 것이 좌절되고 말년에 노나라에 머물 때 몇몇 제자와 공자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자 비로소 방향을 돌려 ‘도를 감추는’ 쪽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공자에게서 ‘수습하여 잘 간직하는 것’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비록 자신을 부른 이가 난신적자였지만

나아가 세상을 구하고 싶었던 공자

 

저자는 공자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50세의 나이에 공자의 마음이 흔들렸던 기회가 찾아왔다. 계씨의 가신家臣이었던 공산불뉴公山不?가 난을 일으킨 후 공자를 찾았을 때, 공자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자로가 반대해서 결국 포기했다. 또한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진晉나라의 대부 조간자의 읍재邑宰인 필힐佛?이 반란을 일으킨 뒤 공자를 찾았지만 자로가 재차 반대해서 또 가지 못했다. 공산불뉴와 필힐은 난신적자(나라를 어지럽히고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인데 그래서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공자의 출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재단하는 것이 정당한가? 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공자는 스물 즈음부터 도로써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마음의 비원으로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억누르고 물러나 시서와 예악에 힘써왔다. 하지만 30년을 제자들을 가르쳐왔지만 실천이 없는 공허한 말들은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다. 공자는 양화가 말한 “아름다운 재능을 가지고도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소”라는 말을 곱씹었다. “인생의 절반을 넘기고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쓰일 기회를 얻지 못한 공자를, 이미 기반을 잡은 공산불뉴가 중용하겠다고 하니 공자가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는가?”(102쪽) 또한 열국을 떠돌 때 “나를 등용한다면 1년이면 기초를 닦고 3년이면 성공을 이루리라”라고 위나라를 떠났던 공자였기에 그 후 진나라에서 필힐이 도움을 청하니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는가? 저자가 이렇게 추론하는 근거가 『논어』에 나온다. 필힐의 부름으로 고민하고 있던 공자는 자로의 질문을 받고 “정말로 단단한 물건은 아무리 문질러도 얇게 만들 수 없고, 정말로 새하얀 물건은 아무리 오염시키려 해도 검게 변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공산불뉴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누군가 나를 초청하여 오길 원한다는 것은 나를 중용하려 함이 아니겠는가? 나를 등용한다면 나는 주나라의 도를 동쪽에 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로는 공자가 나아가는 것을 왜 그리 격렬하게 반대했을까. 유가의 이상과 세상의 이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변하든, 공자가 현실에 무릎을 꿇든 어느 쪽이든 제자 자로는 견디기 힘든 결과이다. 따라서 당연한 반대였다. 하지만 공자는 달랐다. 공자는 세상을 자신의 이상에 맞게 바꿀 자신이 있었다. “나는 주나라의 도를 동쪽에 세울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 자신감이다. 공자는 오히려 자로의 걱정을 타박했다. 『논어』 「자한」에서 공자는 자로를 평해 말한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가지 못하는 자가 있고, 도에 나아가도 함께 확고하게 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스승에 대한 자로의 확고하지 못한 믿음을 섭섭해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105쪽)

저자는 이러한 공자의 자신감을 다소 현실감의 결여된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만약 공자가 염유와 자공, 자로 이 세 제자가 크게 쓰였을 때 그들은 공자가 만들어놓은 이상세계를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의 자신감은 줄어들지 않았을까?”라고 말한다.

 

◆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자의 심리

광야에서 불만을 토하는 제자들과 공자

 

공자의 떠돌이 생활에서 가장 힘들 때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광야에 고립되었을 때다. 이 책의 제4장 ‘광야의 소리’는 국내 독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만한 구절들이 많이 등장한다. 육체적·경제적·심리적으로 총체적 난국에 처한 공자의 심리가 매우 예리하게 그려지고 성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랑의 길로 들어선지 9년 째 고립된 공자 일행은 식량이 바닥났다. 기대했던 초나라 소왕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공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117~118쪽) 배가 고프고 춥고 전란 속에 심신은 지쳐갔다. 공자의 내면에 질문이 떠오른다.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왜 여기서 곤란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공자도 이런데 제자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먼저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상을 품고 부지런히 도를 실천했는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타일렀다. “군자는 곤궁해도 도를 지키고 실천하지만, 소인은 닥치는 대로 탈선한다”고 말이다. 또 다른 세 명의 제자들도 찾아왔다. “우리는 코뿔소도 호랑이도 아닌데, 왜 정착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이리 방황해야 합니까?”(120쪽) 자로가 이 말에 답한다. “우리가 어질지 못해서 세상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 아니겠는가?” 공자는 웃었다.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으면 백이와 숙제는 왜 굶어죽었겠느냐?” 자공이 현실적으로 말했다. “왜 선생님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도를 조금도 낮추지 않으십니까?”(121쪽) 그러자 공자가 화를 냈다. “너의 뜻이 어찌 이렇게 천박해졌느냐?” 안회는 공자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더 군자의 참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도를 갖춘 인재를 중요하지 않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수치입니다.”(122쪽) 공자는 “자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 기꺼이 자네의 재정 관리자가 되겠네.”

말은 이러했지만 공자의 내면은 들끓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특히 안회와 공자의 차이점에 대해서 주목한다. 안회는 자로나 자공과는 달리 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도를 알아주든 말든 ‘자족’할 수 있었다. 공자도 도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하지만 제자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이것은 안회가 스스로 숨어 살려는 일종의 도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공자는 세상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도를 세상에 펼치려는 자의 초조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안회보다 더욱 어렵게 극적인 인내와 자기 수양으로 공자가 도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강조점이 아닐까? 아래는 저자의 정리이다.

“세상은 불합리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은 왜곡된다. 이런 불완전한 세상이 완전해지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한 사람의 인격과 인생의 경지를 완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세상을 좌우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아니 자기 자신만 책임질 수 있는 법이다.”(127쪽)

 

◆ 세상이 꿈쩍 않으면 나라도 바꾸는

낭만적 아이러니의‘자아 찾기’

 

제5장 ‘나루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공자는 곤경에서 벗어나 채나라 지역으로 간다. 가는 길에 채나라 유민으로 생각되는 여러 은자들을 만난다. 저자는 이 과정을 중계하듯이 보여주면서 ‘숨으려는 자’와 ‘실천하려는 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은자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만, 공자는 이와 반대로 세상에 뛰어들어 자아의 완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자가 은자를 마음속 깊이 공경했지만 둘의 삶은 물과 불처럼 달랐다고 말한다. 공자는 되묻는다. “세상을 도피하여 숨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굳이 바꾸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더 나아가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공자가 채나라 땅으로 가면서 만난 은자들이 던진 그와 같은 말이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는 사실! “공자는 마치 팽팽해진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더 이상 예전처럼 의기왕성하지는 못했다”라는 말이 그렇다. 그래서 공자는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제6장 ‘최후의 좌절’은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무렵을 다룬다. 제자들이 큰 공을 세워 계강자는 공자를 예우하여 모셔왔다. 그런데 조용히 지내던 어느 날, 제나라에서 신하 진항陳恒이 군주를 시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공자는 애공을 찾아가 “진항을 토벌하소서”라고 출병을 요청했다. 왕은 제나라는 강대국이라며 난색을 표했고, 실권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시기 자로와 염유는 큰 자리에 올라 있었다. 후세의 학자들은 공자가 유명무실한 노나라의 왕이나 실권자인 삼환을 거치지 않고 제자들의 군대를 이끌고 진항을 토벌할 수도 있었는데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즈음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생긴 돌이킬 수 없는 간극에 주목한다. 당시 노나라는 논밭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법을 추진하고 있었다. 공자는 이에 반대했지만, 염유는 그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가 보시는 계씨 집안을 위해 앞장서서 이를 추진했다. 그러자 공자는 “염유는 우리 쪽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북을 치고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다.”(『논어』「선진」)고 염유를 비난했다. 따라서 이런 염유가 공자의 진항 토벌 주장에 동조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자공과 자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공도 진항이 이미 당시 제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라는 정치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에게 공자의 말씀은 더 이상 절대 진리가 아니었다. 공자의 초기 제자들의 정계 진출은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후 엄청나게 활발해졌다. 공서화公西華는 외교 사절로 외국에 나갔고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자하子夏는 작은 읍인 거부?父의 읍재가 되었다. 유약有若은 애공과 정사를 논했으며, 심지어 훗날 증자曾子의 제자가 된 양부陽膚는 맹씨가 도와 치안을 담당하는 판관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들과 공자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졌다. 제7장에서 저자는 공자와 초기 제자들 간의 입장 차이를 ‘염유’라는 창을 통해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공자와 제자들의 간극을 그들의 인간적인 모자람이나 배신의 문제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도를 포기하지 않는 자’와 ‘도를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자’의 차이임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지적했고, 오히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묘사하는 것을 통해 독자들에게 공자가 말년에 더욱 쓸쓸하게 자신의 도를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다음 문장에서 그렇다. “만을 도를 행하는 것이 편안함과 부귀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상 최고의 도는 도구로 간주해야 하지 않겠는가?”(227쪽)

 

◆ 도가적인 공자와 유가적인 공자 그 끝없는

내면 싸움의 결과가 바로 『논어』와 『춘추』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말한다. 공자에게는 ‘두 세계’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 대목을 아래에 인용한다.

“공자의 마음속에는 아마도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는 도가적이고 은자적인 세상을 떠나려는 공자와, 바깥으로 드러나는 유가적이고 실천하는 그리고 세상에 쓰이려는 공자가 대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세상에 쓰이려는 공자가 세상을 떠나려는 공자를 항상 이겨왔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공자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는 길에서 은자를 만나거나 스쳐지나간 것은 어쩌면 공자의 마음 속에 은둔하고 있던 또 다른 자신과 대화한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현실 속에 실현할 수 없는 도를 추구한 공자가 마지막에 한 선택이 바로 『춘추春秋』의 집필이었다고 말한다. 공자는 “요순의 법도에 맞춰” 『춘추』를 집필함으로써 자신이 현실에서 실천할 수 없었던 도를 기록하고 후기 제자들에게 도를 전해줬다. 그것은 은둔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래 세계에 둔 것이었다.

책속으로만일 공자의 묘비명을 다시 쓴다면

“평생 동안 시대와 맞지 않았지만

전력을 다해 시대와 맞서 싸운 사람이

여기에 묻히다”라고 쓰게 될 것이다.

(『공자, 최후의 20년』 142쪽)

 

공자의 마지막 20년 삶을 본격 조명한 이 책은

그와 초기 제자들 간의 갈등, 사상적 분기를 최초로

탁월하게 분석하고, 현실적 좌절에서 오는 공자 내면의

번민과 흔들림에 대한 뛰어난 추적으로

『논어』를 지극히 역사적·현실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한다. _ 감수의 말

 

“우리는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왜 정착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이리저리 방황해야 합니까?”

- 유랑생활에 지친 제자들의 항변(120쪽)

 

“선생님의 도는 너무도 크고 원대합니다.

그러니 천하의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기가 힘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도를 조금이라도 낮추지 않으십니까?”

- 자공이 공자에게 한 말(121쪽)

 

“그러지 말라. 선생님은 훼손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현명함은 언덕과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스승님은 해와 달과 같아서 오르거나 넘어갈 방법이 없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선생님과 관계를 끊으려 하지만

해와 달의 빛을 어떻게 줄일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줄 뿐이다.”

- 숙손무숙이 공자를 폄하하자 자공이 한 말(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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